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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큐편지] 비로소, 여행을 마시다
작성자 황토니오 작성일 17-01-08 18:3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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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 

매일 같이 야근하던 그때 나는 여행을 꿈꾸었다

 

여행이 어떤 맛일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장 맛있어 보이는 유럽을 택했고, 그곳은 정말 맛있었다

산해진미가 나왔고 그 향마저 황홀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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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는 여행을 맛보기 바빴다 

신기한 메뉴를 찾고, 어떻게 조리된 것인지 비교했으며

무엇과 함께 먹으면 좋을지 생각하는 동안

 

다양하게 즐기며 쌓인 경험과 추억이 내 몸을 건장하게 해주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나는 여행을 마시고 싶다

마신다는 것은 목으로 넘겨 몸속으로 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내 치아로 재단하지 않은 여행지의 있는 그대로를 내 안으로 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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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나에게, 

가만히 여행을 마시는 법을 일러주었다

 

무엇을 먹고 또 어떻게 마시는가 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하지만 이것도 먼저 내 의지로 입을 열어야 먹고 마실 수도 있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아 보여도, 

여행지의 이질적이고 비우호적인 환경을 향해 입을 떡 벌려 놓기가, 처음부터

생각만큼 쉬이 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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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바대로 인도 식당의 위생상태는 열악했다 

 

티베트에 도착한 여행자가 의식인 양 치르는 고산병처럼,

인도에 도착한 여행자에게는 배탈이 지속된다

이 고행자들이 코를 찌르는 인도 음식 냄새를 다시 맡는 순간, 먹기를 거부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픈 몸에도 기를 쓰고 그것을 먹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지역 풍토에 적응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형태로 발전된 것이 음식문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배탈은 짧게 끝나, 이후로는 탈이 나지 않았다

커리는 장과 면역력에 특효가 있었고 몸의 열을 내려주었다

 

그곳에서 알게 된 친구들 중에는 2주, 길게는 한 달 이상 배탈이 지속되어 서둘러 인도를 탈출하기도 했다

몸이 아프니 비싼 돈을 지불하고 상대적으로 청결해 보이는 서양 음식점을 찾았지만 차도가 없었기에

 

화장실에 화장지는커녕 비누도 없는 이 나라에서,

주방장이 만든 정갈한 수제 샌드위치와 샐러드는

기름과 불에 볶고 삶아 살균되는 커리와 부지불식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

전과 다른 의미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여행지에 닿고자 먼저 입을 열어

온몸을 맡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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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나는 히말라야를 오르며 그들을 처음 보았다

 

우리가 마당에서나 신을 법한 고무 슬리퍼, 좀 나으면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커다란 봇짐부터 두꺼운 목재 문짝까지 하염없는 설산 위로 지어 나르던 포터.

 

경력이 쌓여 여행자의 짐을 나르게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형편이 더 낫기에,

십 년을 참고 오르는 사람들

 

 

그들은 느리고 일정한 걸음을 꾸준히 걸었고 

또 엉덩이를 걸치고 자주 쉬었다

등짐을 얹어 놓을 수 있도록 돌을 쌓아 둔 곳이면

어김없이 쉬는 것이다

  

쉼터에 걸터앉아 영혼까지 시원한 공기를 한 모금씩 나눠마시고 있던 그때

간밤에 같은 롯지에 묵었던 한국 분들이 우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 일행 중 가장 멋진 선글라스를 쓴 분은 우리를 발견하고 마침 한마디를 하셨다

 

"또 쉬는 거야? 우리보다 훨씬 일찍 출발했는데 우리가 이겼네 허허

빨리 올라가서 남들이 온수 다 쓰기 전에 샤워 싹하고 술 마시고 노는 게 낫지

거, 게을러서 못 사는 애들이랑 너무 붙어 다니지 말아"

 

장비며 옷까지 전문가 못지않은 맵시를 뽐내던 그가 바람에 날린 말은,

내 곁에 앉아있던 포터의 꾀죄죄한 옷에 와 묻었다

 

그가 밟고 지나는 발걸음 걸음 아래 아래로

포터의 가슴속 잔돌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 포터는 한국말을 아주 잘 했으니까

 

 

이틀 뒤 3,500M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고산병으로 하산 중인 선글라스 아저씨를 마주쳤다

웅장한 히말라야가 두려워진 나머지 짙은 선글라스로 눈을 닫아 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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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포터,  

어떻게 그렇게 산을 잘 올라?

혼자 몰래 뭘 먹었는지 힘이 좋은가 봐 하하"

 

 

"황토니오가 힘 더 좋아요,

짐도 직접 가지고 있잖아요

우리는 안 강해요 우린 천천히 오르고 많이 쉬어요

우리는 계속 여기에 살아가야 하니까요"

 

 

 

맡긴 짐은 없었지만

나는 정상까지 그들과 함께 걸었다


유독 그들만이 사 먹던 초코과자가 아주 맛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여행객은 돌아보지 않는 오르막 모퉁이 경관을 뒤돌아보며 가쁜 숨을 골랐다

 

지나는 이들이 어깨를 잠시 쉴 수 있도록

돌을 쌓은 이들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대자연 앞에 겸손한 호흡으로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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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몸과 마음을 열자, 관계가 생겼다 

 

인도를 생각하면 꼬깃한 종잇 돈과 바꾼 달달한 짜이 생각에 입가가 촉촉하고,

나이프를 들고 고기를 썰 때면 네팔리 포터와 그의 작은 딸이 생각난다

 

단 한 번일지 모를 이방인을 대접하기 위해 굳이 구해온 들소 고기 몇 점을 내어놓고

자신들은 잘 도정되지도 않은 거친 맨밥만 수북이 놓고 마주 웃던.

 

 

 

아무도 보지 않을 때를 기다려

나는 뼈에서 발라낸 고기를 소녀의 밥 안에 몰래 묻어주었다

엄마 아빠 눈치를 보느라 또르르 굴러가던 그 검고 맑은 눈동자를 

나는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자그마하던 소녀도 지금은 숙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소녀가 자라듯 우리도 여행을 통해 자란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조미료를 넣은 여행에만 입을 여는 여행자가 아니라, 

선글라스에 걸러지지 않은 그곳의 진국이 더 궁금한 분이 아직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 부띠끄유럽 여행 프로그램의 의도가 변하지 않고 그 진심이 지속될 수 있도록,

 

여행자의 진정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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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글: 황토니오 

ⓒ 황토니오 문시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시 제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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